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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 불안, 불행, 이기적인 행동


1.

불안 증세가 있다.
직장에서 고객이 나를 죽일듯이 노려보거나
면전에서 욕 먹기를 몇 시간 씩 견뎠던 경험들, 그 이후로
불안하면 손이 급격하게 차가워지는 증상이 생겼었다.

그저 비슷한 상황을 떠올리기만 해도 손 끝이 차가워진다.



어려서부터 발표에 어려움을 느꼈다.
무대 공포증이다.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것이 힘들었다.
대학 때도 발표를 꾸준히 피해 연습할 기회도 없었다.
그렇게 학생일 때는 남들보다 떨리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 공포증 수준인 것 같다.

 

2.



작년 7월을 마지막으로 내가 만들었던 스토어에 새로운 상품을 올리지 않았다.
가끔 커피 한 잔 정도의 이윤을 남기는 상품이 간혹 결제되는데

어제는 상품을 주문한 고객으로부터 문의 전화가 왔다.
친절한 말투를 가진 아저씨였고 대단한 문의가 아니었다.

작동이 안 된다며 사용방법을 물었다. 

영어로 작성된 설명서를 이해 못 하겠다며

버튼 하나 하나 어떻게 작동하는 건지 궁금해하셨다.




무턱대고 전화를 받았는데 나는 정말 지나칠정도로 긴장을 했다.
나에게 재고가 없는 제품이라 나 역시 찾아봐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파는 제품의 사용법조차 모르다니 상식적으로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닌가?
라는 죄책감이 온 몸을 휘감았다.

고객이 나에게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내 신체는 이미 과하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3.


설령 사용법을 모르더라도 제조처에 문의해서 알려주거나
상품에 문제가 있으면 고객에게 설명하고

교환이나 환불 등의 조치를 취하면 된다.

 

나 역시 사용법 관련해서 제조처에 전화를 걸어 물어봤더니
그 쪽도 재고를 갖고 있는 공장이 아닌 일반 사무실이라
내가 고객에게 전한 정도밖에 알려주지 못 했다.

안 되면 또 전화하라는 식이었다.
내 전화를 받은 사람은 나처럼 알려줄 것이 딱히 없는데도

나와는 다르게 여유롭고 오히려 까칠하게 답했다.

 

4.



그런데 나는 같은 조건에서
고객과의 통화 몇 번으로

하루 종일 멘탈이 나갔다.

 

판매하는 사람의 기본도 되어있지 않다는 죄책감으로 전화를 끊은 후에도

여전히 손이 차가운 것을 느꼈고

머리는 누가 라면 스프를 뿌린 것처럼 따사로워(?)졌다. 조금 지나자 머리가 띵했다.
방금 막 울었던 사람처럼 급격한 체력 저하를 느끼고 멍하니 유튜브를 봤다.


이전에 하던 일은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나를 멘붕케 한 그 상품은 마진이 2천원도 되지 않는 상품이었다.

 

5.



내가 고객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나를 보고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넓은 집에서 혼자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치 무대 위에 선 것처럼

불안하고 긴장하는 스스로를 보면서..

너무 당황스러웠다.



아.. 내 공포증이 생각보다 심각하구나.
단순히 무대 공포라기보다 더 큰 범주겠구나 싶었다.



6.



원래 죄책감을 견디지 못 하는 건 알았지만

신체가 너무 과민 반응을 해서 충격이었다.



퇴사할 때 나는 부장님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지만
누구라도 들으면 각별하게 느낄만한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처음 나를 봤을 때 누구한테도 민폐끼치는 걸 싫어하고
정말 예의바른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하셨다고 이야기를 꺼내셨는데


신중한 성격이니 본인만의 목표를 갖고 나가는 것이라 믿고
어디 가서든 잘 할 거라는 걸 알지만, 혹시나 앞으로 삶에서 어려움에 부딪힌다고
그 문제를 회피하기 위한 선택을 해선 안 된다. 어려움을 뛰어넘고 나면

어느샌가 성장한 스스로를 볼 수 있을 거라 하셨다.


아무튼 누구든 살다 보면 부족한 역량으로
혹은 시행착오의 과정을 겪을 수 있는데
나는 아주 작은 일이라도

누군가에게 민폐가 될 것 같으면
멘탈이 황당하게 나간다는 걸 알게 됐다.




7.


이전에는 단순히 내가 무대공포증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보다 더 큰 범위의 불안 증세일까 싶었다.


어느 대학 병원에 올라와있는 자료를 보니
사회공포증 이라는 통칭 아래 여러 종류의 공포증이 나와있다.
어려서부터의 나를 돌이켜보면 분명히 익숙한 증상들이 있다.


불안 증세의 원인은 유전적인 요인일 수도 있고, 자라면서 어떤 사건이나 환경이 계기가 있을 수도 있다. 짐작이 가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성장 환경이라는 것은 너무나 복잡하고 엉켜있어, 불안을 일으키는 하나의 요인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8.



나는 연단 공포, 수행 공포, 공중화장실 공포, 자기 시선 공포를 다 느껴봤다.


연단 공포는 무대 공포로 실제로 나는 사람들 앞에서 내 의견을 이야기할 때
감정적인 떨림이 온 몸을 휘감는 것을 느낀다. 스피치 강의를 수강할 때, 강사님이 지금 말하고 있는 스토리때문에 감정적으로 격앙되어있는 것이냐고 물어봤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슬프지 않았는데도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면 남들이 보기에는 눈물을 떨어뜨릴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수행 공포는 처음 들어봤는데, 내 경험과 일치해서 놀랐다. 내가 생각해도 특이한 케이스로 누구에게 이야기해본 적은 없다. 내 행동에는 평가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내재되어 있다. 나는 심지어 오빠나 우리 가족이 옆에서 내가 하는 일을 보고 있으면 멘탈이 흔들린다.


예를 들어, 오빠와 함께 요리를 만들면 내 몸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혼자일 때보다 우왕좌왕한다. 또, 화장품 가게 매대에서 내가 찾는 상품을 찾다가, 언니가 옆에서 같이 보고 있으면 눈 앞에 물건이 있어도 못 찾는다. 정말 이상하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고 신뢰해주는 사람들 앞에서도 나는 긴장을 한다. 수행 공포라는 말 그대로, 누군가 보고 있으면 내 눈 앞의 일을 수행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9.


자기 시선 공포는 나의 시선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는 것이라 한다. 이것 또한 처음 듣는 말인데도, 내가 심하게 겪었던 증상과 같다.

 

나는 다른 사람을 상처주거나, 민폐 끼치는 걸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그 일환으로 괜히 사람을 쳐다보지 않는다. 내가 빤히 바라보면 다른 사람이 불쾌할 수 있음을 걱정해서, 친구들이 뒤에 있는 사람을 봐보라고 하는 경우에도 절대 안 봤다. 아니 못 본다가 더 정확하다. 그 사람이 알아차리면 얼마나 기분이 나쁠까. 또한, 남을 계속해서 쳐다보는 게 겸손하지 못한 행동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무의식중에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내 시선이 왜 피해가 되는 걸까?

 

10.

 

하여튼 이런 별 일도 아닌 것으로 온 종일 황당할 정도로 고통받았다.